피해망상

개구리가 돌맞고 나면..

내 키는 평균이고, 현재 내 몸무게는 BMI지수 23.34로 정상체중 범위에 들어간다. 물론 정상체중 중에서 과체중 쪽에 약간 가깝지만 어쨌든 정상체중 범위.

고3 초여름까지 나는 살이 무지막지하게 쪄서 당시 어느 계산기에 넣어 봐도 '경도비만'이 나왔다. 그 때는 어차피 아무도 날 안 본다고 생각하고 그냥 다녔다. 난 고3이었고, 교복을 입었고, 연애할 일도 없었으며, 살은 수능 끝나고 빼도 된다더라. 근데 어쩌다 보니 웬 남정네를 만날 일이 생겨버렸다. 나는 급격하게 살을 뺐고(공부?풋.) 몸무게가 '과체중' 범위에 들어왔을 때쯤 그 남정네를 만나서, 여전히 사귀고 있다.

교복은 사이즈가 컸다. 살이 찐 이후에도 전혀 불편함이 없었으니.. 살이 8키로쯤 빠져서는 거적데기를 쓰고 다니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졸업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그냥 입었다. 밀군 또한 그 이유로 내 몸이 빠졌는지 쪘는지 알지 못했을 것이다. 데이트는 대부분 교복을 입고 했으니까. 밀군이 처음으로 나한테 '살 좀 그만 빼' 라고 말한 건 내가 수능이 끝나고 사복을 제대로 입기 시작했을 때부터였다. 나는 그 말을 개무시했고, 겨울방학이 지나는 동안 5키로정도를 더 뺐다. 밀군은 살이 빠져가는 날 보며 절망하기 시작했다. 밀군이 내 다이어트를 반대하는 이유는 크게 네 가지 정도가 있었는데,

1. 밀군은 팔뚝, 배 등 내 살이 자기 손(엄청 큰 손.)에 가득 잡히는 걸 좋아한다.
2. 밀군은 내 다이어트 방식(저녁을 굶거나, 생식으로 대체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참고로 어떤 이유에서인진 모르겠지만 이 방식은 나한테 제법 맞는 방식이었다. 남들이 경고하는 요요현상도 전혀 오지 않았고-연애를 시작하고부터 다이어트 하기 전보다도 많이 먹었으니까-건강이 나빠진 것도 없었다.
3. 남들이 생각하는 그 평균이니, 미의 기준이니 하는 것에 맞추는 꼬라지는 보고싶지 않다.(밀군은 나름 인권운동을 하는 사람.)
4. 밀군은 내가 뭔가 먹는 걸 무지 좋아한다. 뭐가 됐든 뭔가 항상 먹고 있으면 좋아한다. 다이어트를 하면 일단 먹는 양이 줄어든다.

해서 매번 다이어트 하지 말라는 말을 하고 그래도 살쪄서 우울하다는 말에 매번 화를 냈다. 나는 항상 "길에 나가면 사람들이 날 어떻게 쳐다보는지 아느냐" 고 항변했다. 나는 무릎 위로 바지나 치마가 올라가면 연신 그걸 내리느라 바빴다. 지하철에 타면, 뭔가 키득거리는 남자들은 다 내 다리를 보고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상체보다 하체가 더 쪘으니까. 유전적인 이유로 얼굴이 좀 작고, 턱-목-어깨에 살이 없어서 원래 체중보다 7~10kg정도 덜 나가 보이는데도 그랬다. 심할 땐 나갔다 오기만 하면 피곤해서 쓰러졌다. 오늘은 몇 명이나 날 보고 비웃었을까. 몇 명이나 욕했을까. 눈에 너무 띄진 않았을까. 다시는 저 옷을 입지 말아야지. 치마를 입으면 종아리가 굵어서 쪽팔리고, 바지를 입으면 허벅지가, 짧은 것들은 말할 것도 없고, 롱스커트는 몸매를 가리려고 했으니 얼마나 비굴하고 추해 보였을까.

밀군은 나보고 옷맵시가 잘 난다던가, 실제 몸과 옷 입었을 때가 굉장히 차이가 많이 난다고 했지만, 거울 속의 나는 여전히 뚱뚱했고, 나보다 마른 여자들도 다이어트를 한다고 했고, 지하철의 승객들은 나를 자꾸 비웃는 것 같고, 해서 여전히 미칠 듯한 피해망상에 시달리고 있다. 길에서 산 티셔츠가 맞지 않는 경우는 이제 별로 없지만, 얼마 전에 강남역에서 사온 바지가 맞지 않아 정말 우울의 밑바닥까지 내려간 기분이 들었다. 바지는 M사이즈였다. M사이즈 바지가 맞지 않는다니, 죽을 것만 같았다. 그래도 마트 갈 땐 입어도 되지 않을까 싶어 입었더니 엄마가 당장 벗으라고 했지.

그런 식으로 받는 스트레스때문에 이런 상태가 된 적도 있었다. 배고픈 데에 희열을 느끼고, 배고파서 현기증이 나거나 움직이지 못할 지경이 되었을 때 기쁨을 느끼고, 도저히 생활이 불가능해서 뭔가 먹고 나면, 배부를 때는 엄청나게 우울해졌고, 다시는 뭔가 먹지 않으리라고 다짐을 하고. 이게 거식증인가. 물론 현기증과 같은 증세때문에 많이 굶어본 적은 없지만. 하하.

밀군은 계속 괜찮다고 했다. 내가 뭘 입어도 예쁘다고. 옷이 안 맞아서 우울해하면 옷이 작아서 자기 손에도 못 끼울 지경일 거라고 했다. 누구는 남자친구가 그렇게 말하면 다른 사람들이 무슨 소용이냐고 했지만, 문제는 부모는 나한테 여전히 '살 좀만 더 빼면 예쁘겠다' 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엄마나 아빠나, 절대로, 절대로 나한테 '살을 빼지 않아도 예쁘다' 고 말해주지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절대 한 번도 말라보지 않았던 난 엄마나 아빠한테 '지금도 예뻐.' 라는 말을 들어본 기억이 없다. 엄마야 내가 우울해하면 위로 차원에서 몇 마디 해 줬을까. 부모님은 '이 험한 세상에서 니가 차별받는 걸 원치 않아서' 라고 했지만, 그 차별에 자신들도 일조하고 있다는 걸 과연 몰랐을까. 어쨌거나, 날 낳아준 사람들도 나를 뚱뚱하다고 생각하니, 누가 뭐라든 나는 이 피해망상에서 벗어날 수가 없을 것 같다.

글이 정말 두서없는데, 어쨌거나- 트랙백한 당근님의 글같은 글을 보면 용기가 좀 나는 기분이다. 지하철 한 칸에 앉아 있는 사람들 중에 저렇게 생각해주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다면 정말 좋겠지. 스무 살 대학생들이, 뭘 입어도 예쁘다고 말해 주는 사람이 그만큼 있다면 그것도 좋겠지.

하지만 여전히 나는 과에서 제일 뚱뚱하다. 죽을 것만 같다. 얼굴이 못 생긴 건 둘째치더라도 난 너무나도 뚱뚱하고, 남자친구가 있든 없든 한 번씩 말이나 붙여보는 미팅 자리채우기 제안도 나한테는 절대 들어오지 않고, 내 다리는 너무 굵고, 여전히 M사이즈는 맞지 않는다. 죽고만 싶다. 이제 곧 개강인데. 슬슬 체형을 적당히 가려 주는 긴 바지를 꺼내야 해. 밀군이 서울로 올라오면 평소보다 더 많이 먹을 텐데. 여기서 1kg라도 더 찌면 어쩌나.

내가 이런 걸 두려워하는 것보다도,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굉장히 많을 거라는 게 더 비극이겠지.

by 무설탕 | 2008/08/18 02:40 | 소리질러 | 트랙백(1) | 덧글(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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